닫기

무역물류사람들

무역물류사람들

무역물류사람들

  • 장보고
  • 임상옥
  • 홍대용
  • 박지원
  • 정약용
장보고 [張保皐] - 846
장보고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바다로의 진출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여 해상무역왕국을 건설하고 멀리 아라비아까지 그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최고시인 두목은 “번천문집“이라는 책에서 당나라 최고의 영웅 곽분양 이상의 인의와 덕을 지닌 의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엔리쿠사의 3대 좌주인 앤닌은 그의 중국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의 높은 인덕을 흠모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에서는 장보고를 재물의 신으로 섬기고 있다. 또한 장보고를 세계에 소개한 미국 학자 라이샤워는 장보고를 상업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무역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활동

지금의 완도에서 평민 신분으로 태어난 장보고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궁복(궁복), 궁파(궁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당시 신라사회의 골품제로 인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 제약을 느낀 장보고는 신라 현덕왕 2년인 810년경 비교적 신분적 제약에 자유로웠던 당나라로 건너가 강소성 서주 지방 절도사 휘하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하여 819년에는 무령군 중소장에 오른다. 장보고가 소속된 무력군은 이정기 일가를 토벌하기 위한 부대 중의 하나였다.이때 장보고의 나이는 3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휘하에 약 5천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는 계급인 무령군 중소장에 오른 것으로 미루어 무예가 뛰어나고 많은 무공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귀국후의 활동

당나라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당시 해적들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오는 신라인의 참담한 실상을 보고는 울분을 참지 못하던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당나라에서의 지위를 버리고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장보고는 무령군에서 나온 후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기까지 약 5-6년간을 중국에서 머무르면서 중국 산동성 등주현 유산포, 문등현 청년향, 적사포 일대와 대운하 회수 하류 북안에 위치한 사주 연수현 등 중국 곳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결집하여 황해를 활동 무대로 하여 해상 무역에 종사하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간다. 현재도 중국 적산에 남아있는 법화원은 바로 이 시기에 세워진 절이다. 법화원은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인과 공부를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 유학승들의 안식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장보고의 중국 내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국 각지에 세력 기반을 구축한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황해의 해적을 토벌하여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게 할 것을 건의하여 828년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군사 1만명을 거느리는 청해진 대사가 된다. 장보고는 이때부터 서남해안 일대의 왜구와 왜적을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하던 군소 해양세력 들을 평정한 후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바탕으로 중국,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하였고 멀리 아라비아 상인과의 교역도 하는 등 동서문화 교류에도 이바지하게 된다. 당시 신라 상인들에 의해 당나라와 아라비아에서 수입된 각종 귀중품과 사치품은 신라 귀족은 물론 일본 귀족들에게도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의 해상무역의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도자기는 처음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중계무역만 하였으나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도입하여 오늘날의 강진과 해남 지방에서 직접 생산하여 수출하기도 하였고 이 도자기가 훗날 고려자기로 발전한다.

장보고 활동의 무역사적 의의

  • - 해외무역을 부의 원천으로 인식한 선각자
  • - 관중심의 조공무역에서 벗어나 당-신라-일본 삼국의 민간무역을 주도
  • - 청해진 건설을 통한 해외무역의 전진 기지 구축